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란 혁명 (문단 편집) ==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의 수립 == 호메이니는 일찍부터 [[샤리아|이슬람 율법]]에 입각하여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통치하는 [[신권 정치|신정 국가]]를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혁명을 주도한 다른 정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. 당시 이란에서는 이슬람주의자 외에도 서구식 [[민주주의]] 공화국을 지향하는 세력, 서구식 정체와 이슬람주의를 절반씩 섞은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, 이슬람 사회주의 및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이 왕정을 폐지/전복해야 한다는 의견은 일치했기에 혁명 때는 [[힘]]을 합쳤지만 팔라비 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는 서로 자기 입맛에 맞는 정부를 세우려고 하며 적이 되어 대립했다. 크게 나누면 [[이슬람주의]] vs [[세속주의]]의 구도였다. 1979년 3월 30일과 3월 31일에 실시되었던 왕정 폐지 이후 이란의 새로운 정체 수립을 묻는 [[국민투표]]에서 발표된 결과는 이슬람 신정 국가 수립에 찬성하는 비율이 98.2%였고 이슬람주의자들은 이 투표 결과를 근거로 이슬람 신정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. 하지만 투표율 자체를 의심한 다른 정파들은 당연히 부정 투표라고 주장했으며,[* 이들은 다시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.] 이러한 타 정파 세력들의 반발에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[[암살]], [[숙청]], [[공산주의자]] 몰이로 이들을 억압하거나 공격하기 시작했다. 한편 이슬람주의 진영에서도 [[샤리아]]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는데, 아예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통치하는 신정 체제를 주장한 호메이니와 이슬람과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충, 혼합하여 공화주의적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한 카젬 샤리아트마다리(1905~1986) 사이에 대립이 있었지만 결국 신정 체제를 주장한 호메이니 지지파의 승리로 끝났다.[* 하지만 그럼에도 호메이니는 정적 샤리아트마다리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 [[이란 대통령|대통령]], [[부통령]] 등 [[공화제]]의 국가수반 직을 신설하였다. 한편 팔라비 왕조 시대에 존재했던 총리 제도는 팔라비 왕조의 왕정 폐지 이후에도 형식상으로나마 남겼으나 결국 1989년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 개정으로 폐지되었다.] 내부 교통정리를 마친 이슬람주의자들은 6월 18일에 헌법초안을 완성했고, 율법 전문가회의 임원 73명을 8월 3일~4일에 선거로 선출한 다음 심의 끝에 11월 15일에 이슬람 공화국 헌법을 가결한 후 12월 2일~3일에 국민투표에서 98%의 지지율을 근거로 정식으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.[* 참고 자료: 유달승.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193~199페이지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